안중근의사 기념관 특별초대전
 
 

 
 
안중근의사 기념관 외부

 
 
안중근의사 기념관 내부

 
 
안중근의사 동상옆에서
 
 
기념관장외 직원들과 기념촬영 
 

 
 
 
 
 
방문 손님들
 

 
 
2010.11.20일자 조선일보 기사내용
 

 
 
자비사 박삼중스님의 방문 
 

 

 

 
 
 
평촌아트센타 전시의 오프닝 행사

 

평촌아트센타 전시, 최대호 안양시장의 오프닝 축사

 

작가노트

올해 2010년은 [안중근(安重根)의사 순국(殉國)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그러나 [국권찬탈 즉 한일강제병합(韓日强制倂合) 100년]을 맞는 치욕의 해이기도 하여 여러 의미를 새삼 되새겨 나가야 합니다. 각계에서 여러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미술전람회로서 지난 10.26일 안중근의사 의거일에 맞추어 남산에 신축.개관된 <안중근의사 기념관> 및 안양의 평촌아트홀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장한 모습을 유화작품으로 재현한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기념, 대한독립전]으로 관람객들에게 선 보이게 되어 기쁜 마음입니다. 

이번의 작품에는 안중근(安重根),윤봉길(尹奉吉),김좌진(金佐鎭),강우규(姜宇奎),이재명(李在明),홍범도(洪範圖),유관순(柳寬順),이봉창(李奉昌),박재혁(朴載赫)등의 의열(義烈)과 과거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에서 광복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조소앙(趙素昻),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이회영(李會榮) 등의 지도자들과 남자현(南慈賢),김마리아(金瑪利亞),안중근의사의 모친인 조마리아(趙瑪利亞) 여사 등 여성(女性) 들과 헐버트, 스코필드, 장개석(蔣介石), 손문(孫文) 등 외국인(外國人)도 포함된 40여명이며 이분 중에는 처음으로 유화작품으로 그려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강하고 순수한 민족정기를 지닌 분들의 충일한 정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문헌을 접해보면 누구나 그들의 활동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고귀한 지를 알게 됩니다. 본인은 첫 개인전부터 서른명의 초상화를 전시하고나서 매번 초상화와 풍경화 작품을 함께한 초풍전<肖風展>을 개최하였는데 특히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작품활동은 여러 가지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전시를 위하여 작년부터 관련 자료와 문헌수집을 위하여 각지의 기념관 현장을 찾아보았고 관계자를 면담하였으며 특히 제작에 전념하면서 이 분들의 숭고한 활동과 헌신에 대하여 여러 문헌을 통해 새삼 알게되어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독립운동가의 모습은 몇군데 기념관을 제외하고 거의 흑백사진 등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실정입니다.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하여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여 항상 우리곁에 바로 곁에 살아있는 것처럼 접하게 된다면 우리들 인간의 삶 자체도 더욱 고양될 것이며 오늘날 다함께 가치있는 삶을 향해 나갈 교훈이 될 것 같습니다. 

초상화는 사실 얼굴모습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함께 보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강하고 순수한 민족정기를 지닌 분들의 충일한 정신이나마 관람객에게 조금이라도 보여 줄 수 있다면 오래토록 이어져 온 작업에 의미있는 결실로 닥아설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번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 11.19일부터 11.28일까지 10일간 <안중근의사 순국100주년 기념, 대한독립전> 특별 전시 이후에도 이어서 안양의 평촌(坪村)아트홀에서도 12.1일부터 12.7일까지 7일간 <안중근의사 순국100주년 기념, 대한독립展>의 招待個人展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리고 작품 일부는 11.15일부터 11.17일까지 3일간 國會 議員會館(1층 로비홀)에서 국가보훈문화예술협회 주관으로 열리는 <독립운동유공자展>에 참여하여 團體展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동안 이번 전시를 위하여 전시장 제공과 전시추진, 자료제공 및 후원으로 적극 협조하여 주신 안중근의사 기념관과 안중근의사 숭모회, 안중근의사 기념관 건립위원회, 독립기념관, 백범 김구기념관, 전쟁기념관, 우당 이회영기념관, 국가보훈처, 국가보훈문화예술협회, 안양시청 및 안양문화예술재단 그리고 작품활동과 제작에 격려해 주신 여러 기관 및 여러분들에 진심으로 감사를 올립니다.

서양화가 조영규- 작가노트

 

 

월남 이상재 1850~1927 대통령장 1962년, 12호P 60.6x45.5cm 2010년

 

이상재 (李商在 LEE, SANG-JAE 1850~1927) 월남 (月南)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출생지는 충남 서천 ○1880년까지 승지였던 박정양의 개인비서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일본 신사유람단 수행후 개화운동에 관심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가 되자 1등서기관으로 수행 ○1894년 승정원 우부승지, 신교육제도를 창안하고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 설립 ○1896년 서재필·윤치호 등과 독립협회 조직,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척외와 황권확립에 관한 상소 ○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구금 복역 ○1914년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여 청년운동 전개, 일제시 YMCA만은 계속 유지되어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다 ○ 3·1운동 때 구금되었으나 6개월만에 풀려난 뒤 YMCA운동을 통하여 민족운동 주도 ○1921년 조선교육협회 창설, 회장 ○ 1924년 조선일보사장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회장


백암 박은식 1859-1925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 12호P 60.6x45.5cm 2010

 

박은식 ( 朴殷植 PARK, YEUN-SHIK 1859~1925) 백암 (白巖)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출생지는 황해 황주 ○ 과거와 성리학을 공부하다 안태훈(安泰勳;안중근의 아버지)과 사귐, 정약용(丁若鏞)의 제자인 신기영 등에 수학 ○ 1885년 향시 특선, 1888년 능참봉 ○1898년 독립협회 회원 ○ 1885년 황성신문 창간시 장지연과 주필, 1905년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1886년 서우학회(西友學會) 조직, 주필 ○ 1908년 서북학회(西北學會) 창립, 주필 ○ 1912 ∼1915 중국 상하이의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同濟社)·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에 참여, 독립운동 기반구축 ○ 1924년 독립신문사 사장, 임시정부에서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 취임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저서로는 한국통사(韓國痛史) -1864~1911년까지 일제 침략과정 전개 및 항일투쟁의 탄압을 서술,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안의사중근전(安義士重根傳) 등

國魂(국혼)은 살아 있다. 國敎(국교), 國學(국학), 國語(국어), 國文(국문), 國史(국사)는 국혼에 속하는 것이요. 錢穀(전곡), 軍隊(군대), 城池(성지), 艦船(함선), 機械(기계) 등은 國魄(국백)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 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왈우 강우규1859-1920 대한민국장 1962 12호 P 60.6x45.5cm 2010

 

강우규[姜宇奎 KANG, WOO-KYU 1859∼1920] 왈우(曰愚),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출생지는 평남 덕천, 어려서 한학을 수학, 한의사로 지냄 ○1910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이주하고, 지린(길림 吉林)에 광동학교를 설립, 민족교육을 실시함 ○1919.9.2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齋藤實)를 남대문역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사상자 37명을 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920년 재차 거사 도모키 위해 피신중에 체포되어 192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단두대상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 형무소에서 사형 당하기 직전에 유언으로 남긴 한시

 

계정 민영환1861-1905 대한민국장 1962 20호 P 72.7-53.0cm 2009

 

민영환[閔泳煥 MIN, YOUNG-HAN 1861∼1905] 시호는 충정(忠正),호는 계정 (桂庭)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출생지는 서울 견지동 ○호조판서 민겸호의 아들 ○1878~1893년, 문과에 급제후 호조판서, 병조판서,·한성부윤 등 역임 ○특명전권공사로 1896년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하여 고종의 친서를 전달, 1897년에 영국·독일등 방문 ○1898년 독립협회를 지지하고, 친일내각과 대립하다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좌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빼앗기자 의정대신 조병세와 조약파기를 상소, 국권회복운동을 일으키고자 본가에서 자결 순국하다

무릇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도리어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삶을 얻나니, 나 민영환은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 민영환의 유언

 

 

의암 손병희 1861-1922 대한민국장 1962  15호 P  65.2x50.0cm 2009

 

손병희 [孫秉熙 SON, BEONG-HEUI 1861∼1922] 의암(義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출생지는 충북 청원 ○1894년 동학농민 혁명때 북접 통령(統領)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합세 ○1897년 동학(천도교) 제3대 교주로 활동·○1904년 16만명 회원의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 ○1905년 이용구가 친일단체 일진회 (一進會)를 조직하고 을사조약 찬성성명을 발표하자, 손병희는 일진회와 무관함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파 62명을 동학교에서 내쫓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고치고 제3세 대도주(大道主)에 취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 1920년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치료중 1922년 서울에서 사망하다.

 

 
 

헐버트 1863-1949 태극장 1950 15호 P 65.2x50.0cm 2009

 

헐버트 (호머 베잘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미국인 1863~1949) 1950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태극장

○ 출생지는 미국 버몬트주, 한국이름은 흘법(訖法) 또는 할보(轄甫), 감리교회 선교사, 고종황제의 최측근 보필 및 자문 역할과 미국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 한국의 자주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함 ○1884년 다트머스대학 졸업 ○ 1886~1891년 고종이 설립한 영어학원인 육영공원(育英公院) 외국어 교사로 한국에 와서 재직 ○반일입장을 취해 을사늑약 후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만나려 하였으나 실패 ○1906년 한국평론을 통하여 일본의 야심과 야만행위를 폭로 ○1907년 고종에게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파견을 건의, 한국 대표단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하여 회의시보에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협력 ○1919년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 ○대한민국 수립후 1949년 국빈 초대되어 방한중 병으로 죽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위창 오세창 1864-1953 대통령장 196212호 P 60.6x45.5cm 2010

 

오세창 (吳世昌 OH, SE-CHANG 1864~1953) 위창(葦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출생지는 서울 ○ 서예가·언론인·독립운동가. ○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천도교인 ○ 1886년 박문국 주사 겸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의 기자 ○ 1907년 《만세보》 《대한민보》를 창설하여 민족계몽운동 전개 ○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 서명한 33명 중 29명이 체포되어 3년간 복역, 출옥한 뒤 서예가 친목단체인 대한서화협회를 창립 ○ 1921 ~ 1945년 천도교를 통한 독립운동 ○ 광복 후 《매일신보》 《서울신문》 명예사장, 민주의원·전국애국단체 총연합회장

 

 
 

송재 서재필1864-1951 대한민국장 197715호 M  65.2x45.5cm 2010

 

서재필[徐載弼 SUH, JAE-PIL 1864∼1951] 송재 (松齋)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출생지는 전남 보성 ○1879년(고종 16) 전강(殿講)에 장원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참가하다 병조참판에 임명되고 실패하자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 미국으로 망명 ○1893년 미국 컬럼비아 의과대학 졸업. 모교의 강사직과 워싱턴에서 병원 개업 ○1896년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 1896년 독립신문 창간 ○1896년 독립협회 창설, 1897년 독립문을 건립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여론에 호소 ○1945년 귀국하여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독립은 선전만으로 될 수 없고 허장성세(虛張聲勢) 만으로 될 수 없다. 독립의 가장 근본적 요소는 각성한 민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중의 교양에 총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2천만민중이 총궐기하여 독립을 부르짖게 되면 한국의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손 문1866-1925 대한민국장 195315호 P  65.2x50.0cm 2010

 

손문 (쑨원 孫文 1866~ 1925) 호는 중산(中山). 1953년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출생은 중국 광둥성 샹산(香山) ○1912년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공화제 창시자로 국부(國父)로 추앙되었다 ○ 쑨원의 정치사상은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로 대표된다 ○ 중국 국민당 정부를 창건한 손문은 1910년 안중근의사의 의거에 감명받아, 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는 방침을 밝혀 적극후원하여 한.중 항일연합전선의 토대를 쌓았다 ○ 또한 안중근 거사에 대하여 “공(功)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드리우리.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 그래도 처지를 바꿔 놓으니 이등박문도 죄인되리”라 했다.


 
 

우당 이회영 1867-1932 독립장 1962년  15호 P  65.2x50.0cm 2010

이회영 ( 李會榮 1867~1932) 우당(友堂).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 서울 출생 ○백사 이항복의 11대손, 1910년 나라가 망하자 600억원에 상당하는 막대한 재산을 처분하여, 6형제 전 가족 40여명과 중국으로 망명 ○ 1906년 안창호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중앙위원 활약 ○이듬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강압·허구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구상, 고종에게 건의 ○1910년 국권피탈 직후 만주로 건너가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여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들을 양성○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관여 ○1924년 재중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활동, 만주사변 이후 항일구국연맹 의장에 추대 ○1932년 만주에 파괴·암살공작의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 조직과 주만 일본군 사령관 암살을 목표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홍범도 장군1868-1943 대통령장 1962년  15호P  65.2x50.0cm 2010

 

홍범도 ( 洪範圖 HONG, BUM-DO 1868~1943)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출생지는 평북 양덕 ○1907년 일본이 총포급 화약류단속법을 공포, 조선인 포수 소유의 총기를 회수하자 함남 갑산 등지에서 의병활동 ○ 1910 러시아로 망명, 성명회. 권업회. 대한국민의회 등 활동, 국권피탈로 일본의 북청수비대가 증강되자 간도(間島)로 건너가 차도선·조맹선 등과 포수단을 조직하여 교포에게 광복사상을 고취시키고, 애국지사 소집및 독립군 양성에 주력 ○ 1919년 3·1운동 후 간도 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가 결성되자 그 예하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총사령관 ○ 1920년 일본군 부대를 전멸시킨 이른바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지휘 ○1920년 김좌진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제1연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의 일익을 담당. 그 뒤 만주(滿洲)의 독립군을 총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자 부총재


 
 

성재 이시영 1868-1953 대한민국장 194915호 P  65.2x50.0cm 2010

 

이시영[李始榮 LEE, SI-YOUNG 1869∼1953] 성재(省齋)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출생지는 서울 저동 ○1885년(고종 22) 관직에 진출, 1909년까지 평안남도 관찰사·한성재판소장·고등법원판사 등 역임 ○ 안창호·이동녕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구국운동 전개 ○국권피탈 이후 만주로 망명, 1911년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 설립, 독립군 양성 ○1912~1920년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장,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양성, 수많은 독립군 간부를 배출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법무총장, 재무총장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 ○ 1933∼1945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부통령 ○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초대 부통령에 당선, 1951년 대통령 이승만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 사퇴하다.


 
 

석오 이동녕1869-1940 대통령장 196215호 M  65.2x45.5cm 2010

 

이동녕 李東寧 [1869∼1940] 석오 (石吾)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출생지 충남 천원 ○1896년 독립협회 가담,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체결후 상동청년회 조직, 국권회복운동 전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후 조약 무효와 파기 선언의 연좌시위로 체포, 1906년 북간도 용정촌에 망명 ○1907년 귀국후 김구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1910년 국권피탈 뒤 서간도에 경학사(耕學社) 조직,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 권업회(勸業會) 조직 ○ 1918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 1919-1929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 의장 3차례 역임 ○ 1924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 1927-1940 임시정부 주석 4차례 역임 ○ 1929년 한국독립당 조직 ○ 1938년 임시정부와 함께 창사[長沙]로 이전, 쓰촨성[四川省] 치장에서 죽었다. ○ 1948년 사회장으로 봉환식을 거행, 효창공원에 안장하다.

동포여! 우리나라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굳건한 독립을 되찾는 데는 하나는 내 동지들의 단결이요, 둘은 우리 동포들의 단결이며, 셋은 모든 대한민국이 대동단결함에 있으니, 오로지 뭉치면 살고 길이 열릴 것이요, 흩어지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강 양기탁 1871-1938 대통령장 1962년  15호 P  65.2x50.0cm 2010

 

양기탁 (梁起鐸 YANG, KI-TAK 1871~1938) 우강 (雲岡)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출생지는 평남 평양 ○ 한성외국어학교 졸업, 1895년 한영자전(韓英字典) 편수 ○1896년 독립협회 가입, 1898년 만민공동회 간부 ○1904년 영국인 E.T. 베델(한국명 裵說)과 일간신문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5년 《코리아 데일리 뉴스》발행, 주필 ○1908년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 항일운동 전개로 징역 10년 ○1910년 국권피탈후 이동녕, 이회영을 만주에 보내 신흥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 설립 ○1911년 일제가 신민회원 800여 명을 체포하고 105명에 실형 선고시 양기탁은 4년 복역 ○1920년 《동아일보》고문 ○1921년 미국의원단이 내한시 독립진정서를 제출로 투옥, 가출옥후 만주로 탈출, 의성단(義成團) 조직 ○1925년 정의부(正義府) 조직, 독립운동단체 통합, 1926년 고려혁명당 결성, 위원장. ○ 1934년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령 ○1935년 의열단·한국독립당·미주대한인독립당 등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 조직, 대일전선통일에 노력하다가 1938년 장쑤성[江蘇省]에서 죽었다


 
 

남자현 1872-1933 대통령장 1962년  15호 P  65.2x50.0cm 2010

 

남자현 ( 南慈賢 NAM, JA-HEON 1872~1933, 여자)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 출생지는 경북 영양 ○ 1895년 결혼 6년후 남편 김영주가 의병활동으로 죽다 ○ 1919년 3·1독립운동에 가담,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 북만주 12곳에 교회 건립, 10여 곳은 여성교육회를 조직하여 독립정신과 여성계몽을 고취. 독립운동기금 모집 ○ 1925년에 박청산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을 암살하려고 본국에 잠입하다 실패하여 만주로 망명 ○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의 리튼경(卿)이 하얼빈 방문시 왼손 무명지를 끊고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 혈서와 손가락 마디를 보내어 조국 독립을 호소 ○ 1933년 이규동 등과 함께 만주 건국일 3월 1일에 일본군 장교와 주만일국 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차 무기와 폭탄 소지하다 체포 ○ 1933년 단식항쟁중 병 보석되어 62세를 일기로 별세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정신에 있다. 독립은 말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행동으로써 만이 이루어 질 수 있다 - 남자현의 유언


 
 

우남 이승만 1875-1965 대한민국장 1949  15호 P 65.2x50.0cm 2010

 

이승만 (李承晩 LEE, SEUNG-MAN 1875~1965) 우남(雩南)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출생지는 황해 평산(平山) ○1897년 배재학당 졸업, 1907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졸업, 1908년 하버드대학 석사학위, 1910년 프린스턴대학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으로 철학박사 학위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친일정권 반대 시위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의 주필로 만민공동회를 개최,독립운동 전개 ○1904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일본세력 몰아내는데 협력 요청 ○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후 초대 국무총리. 1920년 임시정부 대통령 취임 ○1948년 제헌국회의원 당선, 초대 국회의장·대통령 ○1951년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 1954년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 1960년 대통령에 4선되나 4·19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하다.


 
 

백범 김 구 1876-1949 대한민국장 1962  20호 F  91-73cm 2010

 

김구[金九 KIM, KOO 1876∼1949 본명은 김창수 ] 백범 (白凡)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황해 해주 백운방 출생 ○ 1897년 21세 때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위해 안악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체포, 고종 특사령으로 사형은 면하나 1898년 탈옥 ○1908년 신민회 가입 활동, 1909년에는 안중근의사 의거 관련혐의로 해주감옥에 투옥 ○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형 선고, 1914년에 가출옥 ○·1919년 3·1운동후 상하이로 망명해 1945년까지 임시정부 국무총리대리·국무령 역임 ○ 1928년 한국독립당 결성하여 당수 ○ 1930년 한인 애국단 조직, 의열활동 지원 ○ 1932년 휘하의 이봉창, 윤봉길등 무력활동 시작 ○ 1939,1944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 ○ 1940년 한국독립당 결성, 집행위원장, 한국 광복군총사령부를 조직 ○1948년 유엔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총선거 결의에 반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 제창,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서 정치회담이 실패. 그 뒤 남한만의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정권 장악, 그는 계속 민족 양심에 호소하여 민족통일 원칙을 주창 ○1949년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에 의해 경교장에서 암살당함.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 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文化)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일송 김동삼 1878~1937 대통령장 1962년  15호 P  65.2x50.0cm 2010

 

김동삼 (金東三 1878~1937 ) 일송(一松)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

○ 출생지는 경북 안동 ○ 1907년 고향에 협동학교 설립 ○ 1911년 만주로 건너가 경학사(耕學社)를 조직,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 ○ 1919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참모장, 1920년 지청천과 함께 부대를 안도현으로 옮겨 제2의 군사기지 구축 ○ 1922년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서 대한통의부(統義府) 조직, 위원장 ○ 1923년 북경의 국민대표대회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 의장 ○ 1925년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참모장 ○ 1928년 길림(吉林)에서 정의부,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의 삼부통합회의(三府統合會議)를 진행, 혁신의회(革新議會) 의장,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 중앙집행위원장 ○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순국하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혼이라도 바다를 떠 돌면서 왜적이 망하고/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 보리라./-마포감옥 옥중 유언에서-


 
 

도산 안창호 1878-1938 대한민국장 1962  15호 P  65.2x50.0cm 2009

 

안창호 [安昌浩 AHN, CHANG-HO 1878~1938] 도산 (島山)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출생지는 평남 홍서 ○ 1895년 상경하여 구세학당을 졸업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 ○1898년 이상재(李商在)등과 만민공동회 개최 ○ 1900년 미국서 교포 권익보호를 위해 한인공동협회 조직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귀국 ○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에서 국권회복운동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민중운동 전개, 평양에 대성학교 설립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연루 혐의로 감금이후 미국으로 망명 ○1913년 미국에서 흥사단(興士團) 조직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 역임, 독립신문 창간 ○1932년 윤봉길 의거후 일본경찰에 붙잡혀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1937년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 ○1938년 병보석 가료중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사망. 유해는 서울 망우리 안장, 1973년 부인과 함께 서울 도산공원(島山公園)에 이장.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 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 제 민족을 위해서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


 
 

도마 안중근 1879-1910 대한민국장 1962  50호 F 117-92cm  2010

 

안중근[安重根 Ahn, Joong-Keun 1879~1910.3.29]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출생지는 황해 해주, 아명은 안응칠 ○어려서 한학 수학, 승마·궁술·사격을 익혀 문무를 겸하다 ○1895년 천주교에 입교, 빌렘(Wilhelm) 신부로부터 도마[多默(다묵) Thomas]라는 세례명 ○ 1907년 삼흥학교, 돈의학교 설립, 민족교육 실시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의병군 참모중장,아령지구 군사령관 직책 ○1908년 국민회·일심회와 동의회를 조직,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 담당 ○1909년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를 조직,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를 암살키로 맹세 ○ 1909.3.29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처단 ○ 1910년 뤼순 감옥에서 많은 유필을 남기고 동양평화론 저술중 사형 순국 ○ 안중근 의사로부터 힘을 얻은 항일 독립운동은 후일 중국국민당 장개석 총통의 적극적 지원과 미국 루즈벨트대통령의 호응을 얻어 카이로선언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사항이 특별 기록되고, 8.15 광복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심산 김창숙1879-1962 대한민국장 1962  15호 P  65.2x50.0cm 2010

 

김창숙 (金昌淑 KIM, CHANG-SOOK 1879-1962) 심산 (心山)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출생지는 경북 성주(星州)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의 처형요구 상소로 체포되어 옥고 ○1919년 3·1운동후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독립 호소의 파리장서 제출 ○1920년 중국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 군사선전위원장 ○ 1925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부의장 선출 ○ 1925년 독립군 기지건설을 위한 군정학교 설립 ○ 1926년 김구 등과 협의, 의열단의 나석주를 파견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시킴 ○1927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1928년 징역 14년형 선고로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 일본경찰 고문으로 두 다리 마비, 형집행정지로 출옥 ○ 1945년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책임자로 광복 직전 발각되어 구속 ○1946.1953년 성균관대학 설립후 초대학장과 총장 취임 ○1948년 김구 등과 함께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

나는 포로다. 포로이면서 구차하게 살려고 함은 치욕이다. 실로 내 지조를 바꾸어 변론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옥중에서


 
 

만해 한용운 1879-1944 대한민국장 1962년  15호 P  65.2x50.0cm 2009

 

한용운 (韓龍雲 HAN, BONG-WAN 1879∼1944 ) 만해 (萬海)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출생지는 충남 홍성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 그후 피신하여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 ○1905년 인제의 백담사에서 승려 ○1910년 한·일합병의 국치(國恥)를 참지 못하여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후 만주·시베리아를 방랑 ○1913년 귀국후 불교학원에서 교직생활, 범어사에서 불교대전 저술 ○1913 『조선불교유신론』간행 ○1918년 월간 불교잡지 유심(惟心) 간행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으로 독립선언서 서명, 체포되어 3년간 옥고 ○1926년 시집 《님의 침묵》발간, 시에 있어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하고 은유법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을 노래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과 경성지회장 ○1931년 조선불교청년동맹을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 배후자로 검거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서, 또한 스스로가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자존성은 항상 탄력성을 가져 팽창의 한도 즉 자존의 길에 이르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것이니,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단재 신채호 1880-1936 대통령장 196215호 F  65.2x53.0cm 2009

 

신채호( 申采浩 SHIN, CHAE-HO 1880~1936 단재 (丹齋)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출생지는 대전 대덕 ○ 18세에 성균관에 입학, 1905년 성균관박사가 되나 관직을 버리고 황성신문기자·논설위원 ○ 1906년 대한매일신보 주필. ○ 1907년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참여, 논설로 국채보상운동 지원 ○ 1910년 국권 피탈되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광복회 조직, 부회장 ○1911년 권업회 조직, 권업신문 주필 ○ 1913년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 참여활동○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참여, 한성정부에서는 평정관에 선임, 전원위원회 위원장 겸 의정원의원에 선출 ○1922년 의열단장 김원봉의 초청으로 상하이로 가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 베이징으로 돌아와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 ○1923년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작성 1928년 무정부주의 활동과 관련, 체포 ○1930년 다롄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중 병사했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우사 김규식 1880-1945  대한민국장 196215호 P  65.2x50.0cm 2009

 

김규식 (金奎植 KIM, KYU-SIK 1881~1950) 우사 (尤史)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출생지는 서울 ○고아로 미국 선교사이며 연희 전문학교 창설자인 H.G. 언더우드 집에서 교육받고 미국 유학 ○1903.1923년 로노크대학 문학과 졸업. 법학박사 학위, 1904년 프린스턴대학원 석사학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 역임 ○ 1913년 일본의 교회탄압 시작후 중국 망명 ○ 1919년 임시정부 외무총장자격으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 ○ 1920년 만주에서 대한독립단과 고려혁명군 조직에 참여 ○ 1932∼1935 임시정부 국무위원 ○1942.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시정부 부주석 ○ 1947년 민족자주연맹의장으로 좌·우합작운동에 우측대표로 참여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정계에서 은퇴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고 12월에 병으로 사망


 
 

고당 조만식1883-1950  대한민국장 1970  15호 F  65.2x53.0cm 2010

 

조만식(曺晩植 JO, MAN-SHIK 1883∼1950) 고당 (古堂)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출생지는 평남 강서(江西) ○ 1905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기독교 입교 ○1908년 일본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 졸업 ○1913년 귀국하여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의 교사, 2년 뒤 교장 ○ 1919년 3·1운동에 참가, 체포되어 1년간 복역 ○·1920년 조선물산장려회 조직(평양), 1923년 민립대학 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 ○1927년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 및 평양지회장 ○ 1932년 《조선일보》사장 취임 ○1945. 11월 조선민주당 창당, 월남하지 않고 있다가 1950년에 공산당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전해지나 분명치 않음. ○평생을 민족주의자로서 일관된 삶을 유지하였다


 
 

이재명 의사1886-1910  대통령장 1962  15호 P  65.2x50.0cm 2010

 

이재명 (李才明 1886~1910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 출생지는 평북 자성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 ○ 1904년 미국노동이민 모집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에 가다 ○ 제1·2차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7년 국권회복운동을 목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을 세웠다 ○ 1906∼1907 미국의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 가입 ○안창호의 만류로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는 의거소식을 듣고 귀국 ○친일매국노 이완용·이용구·송병준 등을 먼저 없애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여러 동지와 야학당에 모여 이완용은 이재명, 이용구는 김정익, 송병준은 이동수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계획하였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지금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 친일파 이완용을 저격, 중상을 입히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되었다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순국하기 전 유언


 
 

소앙 조용은1887-1958 대한민국장 1989  20호 P  72.7x53.0cm 2010

 

조용은(趙鏞殷 JO, YONG-EUN 1887-1958) 소앙(素昻)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출생지는 경기 파주 ○1911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 졸업 ○1913년 중국에 망명, 동제사(同濟社)에 참여 ○1918년 만주 지린에서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정의 이론정립 ○ 1919 제네바 국제사회당대회 한국대표로 참석 ○ 1919~ 1945 임시정부 외무부장, 임시의정원 의장 ○1929년 김구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 삼균주의(三均主義)의 정치·경제·교육 균등제창 ○ 1941년 삼균주의를 국시(國是)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으로 국무회의에서 채택 ○ 1948년 김구·김규식등과 함께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행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당선후 6·25 때 납북 ○북에서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가입 활동, 1958년 조작된 <엄항섭 사건>에 항의,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병사하다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주시오-유언


 
 

장개석1887-1975대한민국장 196215호 P65.2x50.0cm 2010

 

장개석( 蔣介石, 장제스 Chiang Kai-shek, 1887~1975년 ) 195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1928~49년 중국국민당 정부의 주석, 삼민주의 청년단 단장 ○ 1948년~1949년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과 중국 본토의 국가원수 ○ 1949년 이후 타이완의 국민정부 주석 ○ 장개석이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후원한 사항은 그는 먼저 쑨원(손문)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웠다. 1919년 8월 쑨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는 방침을 밝힘에 따라 장제스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호의적이었다 ○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장제스는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 ○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수시로 지원금을 보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던 김구와 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김원봉 등을 설득하여 연합전선 구축을 권고함 ○ 카이로 회담 전에 김구 등 임시 정부 요인들을 만나 한국독립을 약속했고,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 등 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장개석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국을 적절시기에 독립시킬 것이라는 합의를 이끌어 냄


 
 

스코필드1889-1968 건국훈장 1968 15호 P  65.2x50.0cm 2009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8~1970 카나다인 한국명 석호필 (石虎弼)

○ 영국태생의 캐나다 감리교 선교사, 세계적인 수의학자이며 세균학자 ○ 일제강점기의 조선과 독립이후 대한민국에서 활동하였다. 그를 “3·1 운동의 제34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석호필은 그의 한국식 이름이다 ○ 1916년 한국에 와서 세브란스(연세대의 전신) 의학전문학교 세균학교수 ○ 1919년 3·1운동후 교수직을 포기하고 이 운동에 적극 협력하고 일제만행을 촬영하여 외국 각지에 알렸다. 특히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참상을 일본헌병 몰래 현장사진을 찍어 미국으로 보내 일제의 야만행위를 국제사회에 여론화시켜 비판하기도 했다. ○ 일제강압으로 1920년에 강제출국 당했다. 한국을 떠날 때 조선총독부에 요청하여 옥고를 치르고 있는 이상재·이갑성·오세창 등 독립지사를 면회하고 격려했다. 본국 캐나다의 토날드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195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10주년 경축식에 초청되어 한국에 왔다. 그후 1969년 2월 한국에 다시 돌아왔고 여생을 한국에서 마쳤다

“내가 죽거든 생전에 정든 한국 땅에 묻어주세요.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을 맡아 주세요.” -유언


 
 

백야 김좌진1889-1930 대한민국장 1962  15호 P  65.2x50.0cm 2009

 

김좌진 (金佐鎭 KIM, JWA-JIN 1889~1930) 백야 (白冶)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출생지는 충남 홍성 ○명문가 출신, 1904년 15세 때 가노를 해방, 소작인에게 토지분배하여 근대화에 앞장 ○을사늑약 체결 후 기호흥학회·청년학우회 결성 ○ 1908 호명학교 설립, 계몽운동 ○ 1913년 대한광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후 1915년 체포, 3년간 복역 ○1917년 만주로 망명, 대한광복회 부사령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 총사령관,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 설립 ○1920년 북로군정서 군대로 청산리 전투를 총지휘, 일본군 제19, 21사단을 상대로 격전, 무장독립운동사상 최대전과를 올렸다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 ○ 1925년 닝안(영안)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후 군사집행위원장, 성동사관학교 설립후 정예군 양성 ○항일투쟁에 힘쓰다가 고려공산청년회의 과거 부하에게 영안현 자택 앞에서 암살당하다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 것이다."


 
 

민세 안재홍 1891-1961 대통령장 1989  15호 P 65.2x50.0cm 2010

 

안재홍 (安在鴻 AHN, JAE-HONG 1891~1965) 민세(民世) 1991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출생지는 경기 평택 ○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졸업 ○1916년 상하이로 가서 동제사(同濟社)활동 ○ 1919. 3·1운동 때는 만세시위 지도, 대한청년외교단에 가입하여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다가 붙잡혀 3년간 복역 ○1924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일보 주필·부사장·사장 ○1927 신간회 조직 ○1936년 임시정부와 긴밀하게 활동사실이 탄로나 2년간 복역 ○1937 군관학교 학생모집 활동으로 옥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간 복역, ○ 광복 직후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부위원장, 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좌우되자 탈퇴, 국민당 결성, 이어 한성일보 사장·비상국민회의의원·민주의원·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후 이해 9월 납북되어 평양에서 죽었다.

내가 이기고 내 파가 이기고 권력과 향락이 나의 부대에 있는가고 즐거워하려 하던 때, 민족과 조국은 어느덧 남의 세력밑에 붙어버렸던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자


 
 
 

해공 신익희1892-1956 대한민국장 1962  15호 F 65.2x53.0cm 2010

 

신익희 (申翼熙 SHN, IK-HEE 1894~1956) 해공 (海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출생지는 경기도 광주(廣州) ○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 1913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졸업 ○1919년 상하이(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내무차관·법무총장·문교부장·외무부장. ○ 1927년 중국 군대의 국민군 중장 ○1935년 민족혁명당 창당 참가·○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참여 ○1941년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회 위원 ○광복 후 1945년 귀국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 부회장 ○1947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장 ○지청천이 이끈 대동청년단과 결탁하여 대한국민당 결성, 대표최고위원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 민주국민당 위원장, 1955년 민주당으로 발전시켜 대표최고위원 ○1956년 민주당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 이승만과 대결차 호남지방 유세중 기차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다


 
 

김마리아 1892-1944 독립장 1962  15호 P  65.2x50.0cm 2010

 

김마리아 (金瑪利亞 KIM, MA-RI-A 1892~1944 여자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출생지는 황해 장연 ○기독교신자로 연동여학교(延東女學校;현재 정신여자중학교) 졸업,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모교에서 교편후 일본으로 유학 ○1915년 동경여자학원 대학예비과에 입학 ○1918년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 ○1919년 2·8독립운동에 가담,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품고 3·1운동의 사전준비 ○3월 5일 서울 모교를 찾아갔다가 일본형사에게 체포되어 투옥○출감하여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하와이 애국부인회에서 보내온 보조금을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하다가 탄로나 3년형 선고○ 1920년 병보석으로 풀려나 1921년에 상해로 망명 ○그곳에서 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사(代議士)·상해 애국부인회 간부로 활약하면서 난징[南京] 금릉대학]에 입학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파크대학 문학부와 시카고대학 사회학과 수학 ○신학을 공부하고 1932년 귀국하여 원산의 마르타 윌슨신학원 교사로 있던 중병으로 사망했다.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어록


 
 

박재혁 의사 1895-1921 독립장 1962  15호 P  65.2x50.0cm 2010

 

박재혁 (朴載赫 1895~1921, 27세)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출생지는 부산시 범일동 ○사립육영학교(현 부산진초교)에 들어가 근대적 교육을 받고,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고, 현 개성고)에 입학하여 최천택(崔天澤)·오택(吳澤)과 의형제로 독립운동을 서약 ○학교졸업후 무역상회 사원으로 일하고 1917년경부터 상해 등 중국, 싱가포르 를 돌며 무역업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유 ○1920년 8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 연락하여 상해로 가서 의열단에 입단, 책 속에 폭탄을 숨겨 귀국한 다음, 부산경찰서로 찾아가 평소 안면이 있던 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교본수평)]에게 폭탄 투척. 일본 경찰서장은 중상후 병원으로 옮겨지는 도중 절명, ○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단식으로 복역중 순국하였다. ○해방후 선생의 시신은 정공단(鄭公壇)에 합사되고, 1969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안장되었다.


 
 

구파 백정기 1896-1934 독립장 1963  15호 P  65.2x50.0cm 2010

 

백정기 (白貞基 BAEK, JUNG-KI 1896~1934,39세) 구파(鷗波)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출생지는 전북 정읍 ○ 1919년 서울서 3·1운동 목격, 고향에서 동지를 규합, 무력항쟁을 전개, 인천의 일본군 시설물을 파괴하려다 폭로되어 만주 펑톈[奉天]으로 망명. ○독립운동 군자금조달차 수차 국내잠입, 주로 베이징을 중심으로 이회영·신채호 등과 독립운동 전개 ○ 1924년 이회영·신채호의 영향으로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 항일투쟁 전개 ○1927년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에서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 조직 ○1930년 북만주에서 자유혁명자연맹 조직 ○1931년 한국·중국·일본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흑색공포단(BTP)을 조직, 배일운동을 전개 ○ 1933. 3. 17 상하이[上海] 홍커우[虹口(홍구)]에서 주중 일본공사 주살(誅殺) 기도하다 잡혀 무기형을 선고받고 ○ 1934. 6. 5 장기형무소에서 옥사 순국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이봉창 의사 1900-1932 대통령장 1962  15호 M  65.2x45.5cm 2010

 

이봉창 (李奉昌 Lee, Bong-Chang 1900~1932)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출생지는 서울 ○서울 용산 문창보통학교 중퇴 ○1924년 금정청년회 간사 ○ 1925년 일본 오사카 철공소 직공 ○ 독립운동에 투신코자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 ○ 일본왕 폭살계획을 추진, 인쇄소 직공, 악기점 점원 등으로 일하며 자금을 모았다. ○그해 12월 일본왕을 암살할 것을 선서한 뒤 다시 일본으로 가 1932년 1월 8일 일본왕 히로히토가 만주국 괴뢰황제 푸이와 도쿄 요요키연병장에서 관병식을 한 뒤 돌아갈 때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암살에 실패, 체포 ○ 7월 19일 대심원 공판정에서 재판받을 때 <나는 너희 임금을 상대로 하는 사람이거늘 어찌 너희들이 내게 무례히 하느냐>며 재판을 거부하자, 비공개재판으로 사형이 선고 ○10월 10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함석헌1901-1984 건국훈장 2002년  15호 P  65.2x50.0cm 2010년

 

함석헌 (咸錫憲 1901∼1989) 2002년 건국훈장

○ 평안북도 용천 출생 ○ 독립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이며 기독교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 ○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후 퇴학되어 2년간 학업중단 ○1928년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졸업, 10여 년간 오산학교에서 교직생활 ○ 1940년 일본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치 ○ 8·15 직후 월남, 1956년부터 《사상계》를 통해 본격적으로 논설을 집필, 5·16군사혁명 직후 한·일협정 반대 단식, 3선개헌과 국민투표 반대운동 등을 벌여 군사정권에 저항 ○ 1970년 《씨의 소리》지를 창간, 발행 겸 편집인으로서 사회개혁의 글을 발표, 독재반대 투쟁과 민권운동 ○ 1984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 ○ 1979년, 1985년 2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1987년 제1회 인촌상 수상


 
 

해풍 심 훈1901-1936 애국장 199010호 F  45.5x53.0cm 2009

 

심훈( 沈熏 SHIM, DAE-SUB 1901~1936 본명은 대섭(大燮). 호는 해풍 (海風) 2000년 애국장

○ 출생지는 서울 ○소설가, (전)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영화인 ○ 1919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재학중 3·1운동에 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 ○1920년 중국 항저우(항주) 치장대학[之江大學(지강대학)]에 입학하여 극문학 공부 ○1923년 귀국하여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 동아일보사에 입사 ○1925년 영화 장한몽(長恨夢)에 이수일역으로 출연○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하고 1927년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집필, 각색, 감독, 조선일보사·경성방송국·조선중앙일보사 등에 입사후는 번번이 사상문제로 사직 ○1930년 《동방의 애인》 《영원의 미소》 《직녀성》 《상록수》 소설 등을 남겼다. 장편 《상록수》는 동아일보 창간 15주년기념 현상소설에 당선된 작품이며 그 상금으로 당진에 상록학원(常綠學院)을 설립. ○《동방의 애인》 《불사조》의 연재 중단과 1930 애국시 《그날이 오면》발표, 《오오 조선의 남아여!》 등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 ○ 1935 '상록수' 등 시, 소설을 통하여 항일의식 고취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울리오리다.-<그날이 오면> 시에서


 
 
  유관순 열사 < Portrait Of  Patriotic Martyr Yu Gwan-sun>

1902-1920  독립장 1962 30호F  91.0x72.7cm 2010년

 

유관순(柳寬順 Yoo, Kwan-Soon 1902 ~1920, 19세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출생지는 충남 천안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선교사 도움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생으로 입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등과 제1학년생으로 서울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 ○그 후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귀향하여 예배당을 중심으로 서울의 독립시위 상황을 설명하면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 ○1919년 고향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 같은 해 음력 3월 1일 아오내[竝川(병천)]장터에서 수천 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 이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 많은 인사들이 피살되다. ○1919년 유관순은 주모자로 체포,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지방법원의 판결에 불복항소,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시 항거하여 7년형을 선고 ○ 1920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고문으로 옥중 순국

나는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당신은 내게 죄를 줄 권리가 없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는건 당연한 일이다


 
 

육사 이원록 1904-1944 애국장 1990년  15호 P  65.2x50.0cm 2010년

 

이원록 (李陸史 본명 이활(李活), 1904 ~1944) 육사(陸史) 1990년 애국장

○ 출생지는 경북 안동 ○육사는 호인데 대구형무소 수감번호인 264에서 따 온 것이다. ○ 중국 베이징 조선군관학교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후 잡지 발간하고 신조선 신문기자로 활동, 사회운동에 참여 ○ 1925년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 ○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번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 1932년 한국군관학교 수료(중국 남경), 중국을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43년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송치된 뒤 1944년 옥중(獄中) 순국 ○ 1935년 30살에 시를 쓰기 시작, 목가풍의 시 《청포도》 《교목(喬木)》 등 민족시(民族詩) 30여 편 발표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광야>에서


 
 
 
매헌 윤봉길 1908-1932  대한민국장 1962년  30호 P 91.0x65.2cm 2009년
 

윤봉길( 尹奉吉 YOON, BONG-KIL 1908~1932) 매헌 (梅軒)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출생지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 1918년 덕산보통학교 중퇴, 서당에서 한학 ○ 1927년 야학을 열고 농민독본 저술 ○1928년 부흥원 설립, 농촌개혁 실시, ○1929년 월진회(月進會) 조직, 농촌부흥운동 ○1930년 가족에게 편지를 남기고 중국 망명, 백범 김구선생 만남 ○193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옮겨 안공근 집에 숙소 ○ 1931년 임시정부의 국무령 김구에게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힘 ○1932년 일본왕 생일 4월 29일에 훙커우공원 전승기념식 예정되자 김구 등 협의후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결정 ○일제침략 원흉인 상하이 파견군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백천의칙)],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 즉사 및 여러명 중상 ○ 윤봉길은 거사직후 현장체포,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 오사카로 호송되어 12월 19일 총살형을 당하다

사람은 왜 사느냐 ?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해환 윤동주 1917-1945 독립장 1990년 10호 F  45.5x53.0cm 2010

 

윤동주 [1917~1945] 아명은 해환(海煥). 1990년 독립장

○ 출생지는 북간도 명동촌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자,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 ○1936년 중국 광명중학교에 진학하여 詩작품을 통한 항일 민족정신의 기초를 닦음 ○ 19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민족정신과 조국독립을 위해 '서시’,‘별헤는 밤’등 많은 항일민족시를 발표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발표 ○1942년 일본 리쿄대학[立敎大學(입교대학)] 영문과 입학, 그해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동지사대학)]으로 전학 ○1942년 일제의 징병제를 반대하며 저항정신 시작품을 발표하는 등 민족적 문학관 확립에 전념하다 체포되다 ○1943년 귀국 직전에 항일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규슈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옥사하였다. ○유해는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 죽어서 비로소 시인이 되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에서